종이 PAPER, 바람 WIND, 바람 WISH
<평면 오브제에서 설치와 영상으로>
초기작에서 보이는 최필규 작가의 종이 작업은 종이의 구겨진 듯한 착시에서 비롯된 ‘평면 오브제’ 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한국미술에서의 모더니즘적 경향이 평면에 나타난 환영(illusion)을 극복하는 것이었다면, 그의 에어브러쉬 작업은 실제 물리적 깊이를 만들거나 종이 의 질감을 표현한 ‘평면오브제’로서 물질과 이미지의 관계에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실제 나뭇가지를 캔버스 속에 들여오거나 종이가 겹쳐지는 조각적 요소를 표현해 오면 서 사용한 일관된 소재는 바로 ‘종이’이다.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은 ‘종이’라는 매체의 의미를 넘어 평면으로서의 종이가 ‘종이조각’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그의 조형적 시도에 주목을 한 작품들이다.
종이나 린넨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종 이조각’을 그리거나 오브제를 첨가하는 방식의 조형적 실험 의지는 마침내, 이번 전시 1층에 설치되는 <생명의 나무>에서 극대화를 이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보이는 가운데에 설치한 거대한 대나무 기둥인 <생명의 나무>로 향하는 길에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가 있다. 바닥에 깔린 볏짚으로 만들어진 길이 그것이다. 볏짚을 밟고 지나야만이 <생명의 나무>에 도달하게 되는 그 길은 바로 관람객 이 오가며 만들어질 길이다. 삶이 그렇듯 예정되지 않은 모든 길은 무언가를 행할 때 만들어 진다.
2층 아카이브 전시실에서는 익숙히 알고 있는 그의 종이 작업이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 며, 3층 뿌리의 방에 들어서면 무수한 ‘종이조각’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을 이어주는 듯한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듯, 천강신화(天降神化)를 연상하게 하는 나무와 종이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에서 우리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 회로에 저절로 스며들게 되는 것 이다. “탄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가벼움과 무거움, 음과 양의 상대적 개념은 평행적인 위치 에서 공존한다”는 그의 사유를 반영한 듯 지상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원이 무수한 종이 위에 자리한다. 나오는 길 우측에는 오지리에서 촬영한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창호지 겹겹이 바람에 흔들리는 영상 이미지를 재현해 놓아 그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이미지>
매체는 달라도 수십 년간 지속해 온 최필규 작가의 작품 소재는 ‘종이’이다. 더 정확히 말하 면 ‘나무에 붙어있는 창호지’이다. 이는 작가가 언급한 대로 “어릴 적에 경험한 ‘성줏대’의 기 억”과 관련된것으로 <흔(痕) : 시간을 담다>에서도 유사한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성 주(成造,城主)라는 것은 집을 관장하는 최고의 신인데 성주신의 신화 〈성주풀이〉에 보면 소나 무의 탄생 신화와 관련된다. 소나무 가지이자 성주의 상징인 성줏대는 나무와 종이로 이루어 진 그의 작품에서 그 이미지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결국 자손의 번창과 부귀공명을 기원하 면서 잡는 성줏대의 기억은 시간의 흔적을 다루는 그의 작업에서 ‘종이조각’으로 구현된 것이다.
베르그송(Henry Bergson,1859-1941)에 의하면 ‘기억’은 과거 이미지들의 존속이며, 이 이 미지들은 현재 지각과 혼합되어 현재 속에 과거의 무수한 순간들을 ‘지금’이라는 직관 속에 응축시킨다. 또한 정신분석학적으로 ‘기억’은 과거를 틀 짓는 방식이 현재 시점에서 변화된 위 치인 전위(displacement)와 현재 위치에서 재(再)약호화 되는 ‘변위(parallax)’ 에 의해 조정을 받는다. 이러한 “지각과 기억의 작용에 영향을 주는 외부성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해석하 고 의미를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감각적 처리 과정에서 발생(Katherine Hayles,1943-)”한다. 마치 공간 개념이 물체라는 큰 틀이 있어야 가능하듯 시간의 심리적 기원은 기억이 되고, 기 억은 이미지를 담는 방식인 ‘종이조각’이라는 ‘매체’(媒體,media)에 의해 드러난다. 따라서 창 호지 겹겹이 대청마루에서 나부꼈던 그의 유년 시절의 기억은 무의식으로 남아 작업을 하는 순간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되었던 것이다.
최필규 작가에게 기억은 과거의 주술적 경험의 이미지이자 시간의 흔적이다. 대청 마루에 걸린 성줏대를 조형적으로 받아들인 ‘종이조각’들은 작품을 이룬다. 또한 모호하게 종이 가닥 을 쌓고 나열하는 작업이나 종이들 사이로 붓질을 한 작업 역시 보고자란 터줏가리에서의 기 억으로 보인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쌓은 터줏가리는 농사를 관장하는 지신(地神)을 모신 곳 간(庫間)으로 그 재료가되는 볏짚의 기억은 종이의 겹침으로 혹은 거친 사선의 연필선이나 붓질로 표현된다. 종이의 결을 따라 찢고 구기고 흩뿌리던 볏짚의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새겨 지고 ‘종이와 나무’라는 물질로 매개되어 다양한 조형언어로 읽을 수 있도록 전시된다.
장뤽 낭시(Jean Luc Nancy,1940-)에 의하면 이러한 기억 이미지는 “현재를 드러내는 기술”로서 드러나기에 작가에게 자연과 시간의 흔적은 아마도 평면 오브제에서 영상과 설치, 그 이상의 기술로 진화되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해본다.
<종이 PAPER, 바람 WIND, 바람 WISH>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1908-1961)에 의하면 세계와 원초적으로 만나는 ‘지 각(知覺, perception)’의 행위는 신체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최필규 작가의 종이가 겹 쳐지고 그려지고 설치되는 신체적 경험에서 본래의 종이의 성질은 사라지고 새로운 물질로 변 모한다. 종이를 만드는 반복적인 과정에서 시간의 흔적과 함께 손이 닿은 물질은 무언가를 바 라는 존재로 확장되면서 종이라는 존재를 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자리 잡은 ‘바람(wish)’은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생각’이라는 것이 전기화학적 자극이나 신경세포 안의 신경생리학적인 기반임을 이해한다면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물질성을 지닐 수가 있다. 이는 오직 존재하는 물질과 연관될 때만이 경험될 수 있기 때문에 “창호지가 바람에 나부꼈던” 기억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인 종이 작업과 물리적 상호작용을 이룰때 재물질화가 되는 것이다. “종이의 구겨짐과 찢김의 기억을 넘어 종이의 물질성에 (…) 시간의 축척을 상징적으로 종이의 겹쌓임을 작업(작가노트)”하여 왔던 작가의 80년대 종이의 물성 연구 역시 그러한 재물질화의 시도로 보인다.
이번 전시의 3층 어두운 방에 설치된 원형의 종이조각, 그리고 땅의 기운을 상징하는 네 개 의 구 안에 자리한 대나무 이미지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만나 생명력을 찾는다는 고대 인들의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작가노트)”을 표현한다. 또한 벽면 에 설치된 서른개의 뿌리 작품은 피고지는 자연의 순환에 대한 바람(wish)을 물질로서 보여 준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사안녕을 빌었던 바람(wish)들은 나뭇가지에 붙은 창호지 가 바람(wind)에 흔들리는 성줏대의 영상 이미지로 남는다.
이러한 최필규 작가의 초월적 세 계는 다양한 종이 작업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물질로서 전시되어 소원 성취의 ‘감정’을 우리 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도록 해 주는것은 아닐까 한다.
김연희 / 예술학박사,미술비평
<FROM FLAT OBJECT TO INSTALLATION AND VIDEO>
Phil-kyu Choi’s early works reveal his exploration of “flat objects,” which emerge from the illusion of crumpled paper. In a time when Korean art aimed to overcome the illusionary qualities appearing on flat surfaces as part of its modernist tendencies, Choi’s airbrush works appear to be attempts to reconcile the relationship between material and image through creating actual physical depth or expressing the texture of paper. Furthermore, consistently using the medium of “paper,” he went on to incorporate actual branches into canvases or depict layered paper as sculptural elements.
The works presented at Museum SAN go beyond the notion of “paper” as a medium, transforming paper into a new form, a “paper sculpture,” within the realm of the flat surface. Utilizing materials such as paper or linen canvas and acrylic paints, Choi’s sculptural experiments culminate in the installation <Tree of Life> on the first floor of this exhibition.
Upon entering the exhibition space, a significant presence is the colossal bamboo column installation, <Tree of Life>, which marks the path towards it with a symbolic ritual of passage. The path, made of laid straw, requires stepping upon it to reach <Tree of Life>. This journey symbolizes the path viewers must create themselves as they traverse it. Much like life, all paths that are not preordained are forged when one undertakes something.
The second-floor archival exhibition displays Choi’s familiar paper works, showing the traces of time, while the third-floor Roots Room offers an experience of an abundance of “paper sculptures” descending from the sky to connect with the ground. Like a cascade, the installation work of trees and paper, reminiscent of celestial transformations, naturally draws us into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Reflecting his philosophy that “birth
and death, joy and sorrow, lightness and heaviness, the relative concepts of yin and yang coexist in parallel positions,” the floor is adorned with circles symbolizing the universe above countless sheets of paper.
On the path leading to the right, an image is replicated branches captured in Oziri, fluttering in the wind offering a glimpse into Choi’s relentless spirit of experimentation.
<TIME, MEMORY, AND IMAGE>
Although the medium may differ, the material that Phil-kyu Choi, the artist, has persisted with for decades is ‘paper.’ To be more precise, it is ‘window paper’ attached to trees. This is closely related to what the artist mentioned as the “memory of the red string” he experienced in his childhood, and a similar image continues to appear throughout ‘<Traces: Capturing Time>’.
The term ‘Seongju’ refers to the supreme deity who governs a house, and it is associated with the birth myth of the pine tree in the mythology ‘Seongju Pul-i’. The pine tree branch, which is also the symbol of Seongju, can be deduced as an image in his works composed of wood and paper. Ultimately, the memory of holding the ‘red string’ with the hope for descendants’ prosperity and prestige is materialized as ‘paper sculptures’ in his works that deal with the traces of time.
According to Henry Bergson (1859-1941), ‘memory’ is the persistence of past images, and these images intermingle with present perceptions, condensing numerous moments from the past into the intuition of the ‘now.’ Psychoanalytically, ‘memory’ is adjusted by ‘displacement,’ which alters the construction of the past from the present moment, and ‘parallax,’ which is the re-enciphering from the present position. The external influences on the interaction of perception and memory arise from the sensory processing of interpreting information from the environment and situating meaning within a context (Katherine Hayles, 1943-).
Just as the concept of space requires the presence of an object, the psychological origins of time become memory, and memory, which is the method of containing images – ‘paper sculptures,’ becomes revealed through the medium. Therefore, the memories of Choi’s childhood, embodied by layers of window paper on the grand porch, unconsciously persist, and in each creative moment, the past and present intersect, creating images.
For Phil-kyu Choi, memory is an image of mystical experiences from the past and traces of time. ‘Paper sculptures,’ conceptually derived from the Seongju hung on the grand porch, constitute his works. Moreover, his works that ambiguously stack and arrange paper strands or involve brushstrokes through the gaps between the paper strands are also reminiscent of the memories of the thatched porch. The thatched porch, woven with straw and used to honor the earth deity who oversees farming, serves as the inspiration for the material straw, and its essence is expressed through the overlapping of paper or the rough diagonal lines of pencils or brushstrokes.
Memories of straw being woven, torn, rolled, and scattered are unconsciously inscribed and, mediated through the materials ‘paper and wood,’ are exhibited in various forms of artistic expression. According to Jean Luc Nancy (1940-), these memory images emerge as a “technique that reveals the present.” Thus, considering the artist’s connection to nature and traces of time, one could anticipate that these might evolve beyond flat objects, expanding into videos and installations, even surpassing such techniques in their evolution.
<PAPER, WIND, WISH>
According to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the act of encountering the world through ‘perception’ fundamentally occurs through bodily experience. In Phil-kyu Choi’s works, where paper is layered, drawn upon, and installed as a bodily experience, the inherent nature of paper disappears and transforms into a new substance. In the repetitive process of making paper, the material touched by the hands, along with the traces of time, extends into a ‘wish’ for something, transforming the existence of paper.
We might think that the ‘wish’ firmly held in our minds isn’t a material, but understanding that ‘thought’ is electrochemical stimulation or neurophysiological foundation within nerve cells, ‘thought’ can inherently possess materiality. However, this can only be experienced when associated with existing materials. Thus, the memory of “window paper fluttering in the wind,” which is a wish to create something, becomes materialized through
the physical interaction when it interacts with paper works.
The artist’s exploration of the material nature of paper in the 1980s, beyond the memory of paper’s creases and tears, is an attempt at such materialization, symbolically represented by the layering of paper, as stated in the artist’s notes.
The circular paper installations on the third floor of this exhibition and the bamboo image within the four circles symbolizing the energy of the earth represent the ancient thought of the convergence of ‘heavenly energy (천기)’ and ‘earthly energy (지기)’ to find vitality.
This signifies the moment of conception of new life, as mentioned in the artist’s notes. Additionally, the thirty root artworks installed on the wall symbolize the wish for the cycle of nature’s prosperity as a material. The wishes that sought safety and peace in adverse conditions remain as images of the ‘red string’ attached to branches swaying in the wind.
These transcendental worlds of Phil-kyu Choi are exhibited as materials created through the ‘sensation’ of various paper works, perhaps enabling us to place the ’emotion’ of wish fulfillment into our pockets.
Kim yoen hee / Art Theory and Criticism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