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최필규의 “종이 조각(紙片)”을 그린 작품은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종이조각”을 종이나 리넨,, 캠퍼스에 아크릴을 사용해 그리거나 오브제를 첨가하거나 한다. 또한 믹스트 미디어, 설치미술, 영상을 첨가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거기에 그려진 고르지 않은 각양각색의 인간상과 같은 각기 다른 “종이조각”은 물론, 내가 주목하는 것은 모든 작품에 존재하는 깊은 흑 = 암흑이다. 그것은 그려지는 공간 안에 “종이조각”과 “종이조각”을 구분 짓는 아주 작은 공간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종이조각”에 투영되는 “종이조각” 간의 그림자나 “종이조각”의 상부로부터 어렴풋이 드리워지는 그림자인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최필규의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것은 그림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종이조각”은, 나무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2000년대 후반의 작품에 나무의 오브제가 첨가되거나 나무가 작품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윤회전생(輪廻転生)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2010년 초의 작품들을 보면 “종이조각”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차가운 시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종이조각”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지만 그 무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동향을 냉정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2010년 후반의 작품들은 반대로 개개의 “종이조각”들을 응시하는 뜨거운 시선이 전해진다. 각각의 세부의 차이를 응시하고 개개의 존재에 대해서 고찰함으로 그 특징을 밝혀내는 열기를 발하고 있지만, 역시 이 작품들에서도 무언가 차가운 분위기가 풍겨져 나온다. 2020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이 두 시선이 혼재하여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낸다. 그 뿐만 아니라 “종이조각”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사물과 현상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작품도 있다.
돌아보면 최필규의 작품은 항상 그러하였던 것 같다. “종이조각”으로 보여지지만 전혀 다른 것을 그려내는 것이다.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롤랑 바르트의 디노테이션과 코노테이션의 문제를 합쳐 놓은 듯한, 예술 세계는 항상 이승과 저승, 현세와 영원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최필규의 <작품노트2>에도 “생과 사”의 문제가 그려져 있다. 우리들은 생의 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만, 생과 죽음이 같은 것이라 하면 죽음의 지점에서 생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란 제도일 뿐이고 현실에는 현재, 과거,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7살 때 창문에 등을 기대고 아버지의 명일에 사람은 기도를 하고 신을 괴롭히면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은 잊어버리기 싫다고 한 것을 기억할 때, 나는 그 때의 자신과 완전히 같은 사람이다. 지금도 그 사람이다.” (한나 아렌트 『思索日記』1970年7月) 죽음의 지점에서 생을 확인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종교나 주술일 것이다. 박영택은 최필규의 “종이조각”에서 “신을 부르는 매개”를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종이조각” 뒤의 “신”이나 “저승”만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대편의 세상을 돌파하는 인간 본래의 모습,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과정을 찾아가는 것이다. 최필규의 작품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우리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미야타 테츠야 / 일본근대미술사상사연구
「自らの道を突き進むしかない」
崔弼圭の「紙片」を描いた作品は、既に高く評価されている。崔は「紙片」 を紙やリネン、キャンバスにアクリルで描いたり、オブジェを添えたりす る。また、ミクスド・メディアで仕上げたり、インスタレーションや、時に はそこに映像を加えたりしている。
そこに描かれる、不揃いで百人百様の人間のように異なる「紙片」の尊重は 勿論だが、私が注目するのは、どの作品にも存在する、深い黒=闇である。 それは描かれる空間内の、「紙片」と「紙片」とを区別する、ほんの僅かな 場所の場合も含まれている。
または、「紙片」に投じられる「紙片」 同士の影、「紙片」の遥か遠く上方 からうっすらと浮かび上がる影であることもある。オブジェが生み出す影の 時もある。いずれにせよ、崔の作品で重要なキーワードになるのは、影であ ることは間違いない。
「紙片」は、樹木から生まれている。2000年代後半の作品に、樹木のオブ ジェが添えられたり、樹木が描かれたりすることは不思議ではない。これは 単なる輪廻転生や生々流転を表しているのではなく、もっと根源的な何かを 私は読み取る。
2010年代前半の作品群は、「紙片」達を俯瞰しているような、冷めた眼が 何処かに存在する気がする。「紙片」 達は群れを成し、その群れがどの方向 に向かっているのかは定かではないが、その動向を冷静に見詰める視線を感 じる。
2010年代後半の作品群は、逆に「紙片」達の個人を、凝視するような、熱 い眼差しが伝わってくる。それぞれの細部の違いを見極め、個々の在り方を 考察し、その特徴を炙り出すような熱気が視座から発していても、やはり何 か冷めたような雰囲気を醸し出す。
2020年以降の作品群は、この二つの視点が混在し、新たな視覚を生み出し ている。それどころか、「紙片」を見ているようで、全く異なる事物と現象 に眼を投じ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さえ思う作品がある。振り返れば、崔の作 品とは、常にそうなのではないだろうか。
「紙片」と思わせて、全く別のものを描く。F・ソシュールのシニフィアン とシニフィエの提案、R・バルトのデノテーションとコノテーションの問題 を引き合いに出すまでもなく、芸術の世界は、常に此岸と彼岸、常世と現世 が描かれる場合が多々ある。
崔の〈作業ノート2〉にも、「生と死」の問題が語られている。我々は生の 地点から死を眺め、怯えていると思っているが、生と死が同じものであると すれば、死の地点から生を確認しているということもできる。時間とは制度 であり、事実に現在過去未来は存在しない。
「自分が七歳のとき、窓に背を当ててもたれて、父の命日に一ひとは祈りを して神を煩わしてはならない、そして自分は忘れたくないと一考えていたの を思い出すとき、私は自分と完全に同じである、今でも私はその私である」 (H・アーレント 『思索日記』 1970年7月)。
死の地点から生を確認するのに必要な条件とは、宗教や呪術であろう。パ ク・ヨンテクが語るように、崔の「紙片」に「神を呼ぶ媒介」を読み取るこ とも可能だ。しかし我々は「紙片」の背後に「神」や「冥府」を思い浮かべ るだけではない。
反対側の世界を突き破った、人間本来の姿、自分が何処から来て何処へ向か っているのかという道程を探すのである。崔の作品とは、此処に位置する。 崔の作品を見て我々は、どのようなことがあっても、希望を捨てず、自らの 道を突き進むしかないことを見つけるのだ。
(宮田徹也 | 日本近代美術思想史研究)